역사



역사 관련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반유대주의

모바일 App 사용자에게는 실시간 전송!

안티세미티즘-유대주의 (Anti-Semitism)

 

요즘 외신에 헐리웃에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 등장하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광기가 자칫 반유대 감정이 일어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2000여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민족이란 오명과 미움을 당해야 했던 유대인들에겐 안티세미티즘-반유대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피해의식을 보이는 것 같다.

 

1. 안티세미티즘(반유대주의)에 대해서..

안티세미티즘이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신문기자 빌헬름 마르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Semite(세미트)’, 즉 셈족에 대한 반감, 적대감이라는 어원적 뜻을 가진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같은 셈족에 속하는 아랍인은 제외한 채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데 사용돼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이나 반감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 안티세미티즘의 진행 과정

 

a. 초대 유럽사회에서 기독교 사제의 반유대 감정

저스틴 마티어와 오리겐-유태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함.

A.D 300년 유세비우스-유태인들이 부림절에 그들에 의식에 쓰기 위해 크리스천 어린이들을 죽였다고 주장.

크리소스톰 유태인에 대한 속죄는 없다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그들을 증오했었다.””그리스도의 암살자요 악마의 숭배자로 규정한 유태인들을 혐오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기독교인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A.D 420년 제롬 [유태인의 논문]에서 유태인들은 성경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이 진실한 믿음을 고백할 때까지 단죄되어야 한다고 입증.

A.D 430년 어거스틴- 유태주의와 유태인들을 각각 타락영원한 죄의 무지라 부름. 유태인들과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유태인들을 종의 위치로 격하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A.D 444년 시릴-유태인들에게 개종,망명 혹은 돌에 맞아 죽는 것 중에서 선택하도록 함.


b. 십자군 운동과 유대인의 수난

1099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 있는 30만 명의 유대인들 중 299천명이 죽음 당함.(추정치)

 

c. 13세기 서유럽

유대인의 상업활동 제한

노예 미소유로 농사 불가능

남자의 13세 이상 여자의 11세 이상, 겉옷의 앞 뒤에 유대인 표시(노란 딱지)

 

d.14세기 서유럽

1348년 흑사병-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섞은 것으로 간주, 고문을 가해 죄를 인정케 함.

게토(ghetto) : 도시 안의 작은 유대인 거주 지역

영국 켄터베리 주교-모든 유태인들에게 영국을 떠날 것을 명령, 재산을 영국 정부에 귀속.

 

e. 15-16세기(르네상스 종교개혁시기)

유대인 박해 양상

-의식 살인 혐의 : 유월절에 기독교 남자 아이를 납치하여 죽인후 그피를 무교병에 발라먹는 다는 오해

-성찬식 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 종교재판을 통한 고문, 화형시킴

cf) 스페인-1492년 토르쿠에마다에 의해 15만명 중 10만 유대인들 추방.

여전히 게토 안에서의 제한적인 삶(독일, 이탈리아 베니스, 스페인 등)

 

f. 17세기~19세기

1648-러시아 우크라이나,스웨덴의 폴란드 침략으로 이곳의 10만명 유대인들을 사망.

1881년 러시아-‘짜르 암살음모에 가담 혐의로 박해- 남부 167개 마을 약탈, 파괴.

키시네프 학살 유태인에 대항한 폭동 20세기 초에 일어남

1894년 프랑스- 드레푸스(Alfred Dreyfus) 사건- 독일 스파이로 지목,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분위기 고조

20세기 초 - 독일의 히틀러 약 600여 만명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학살 추정.

 

3. 안티 세미티즘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태인이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유태인에 대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역사상 그들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태인들로부터 이익을 얻은 것도 손해를 본 것도 없다. 이스라엘이 독립 이후 중동의 아랍국가에 둘러싸여서도 나라를 지키는 모습은 분단의 현실 앞에 모범적인 교과서 노릇을 했다. 외국에 있다가도 전쟁이 나면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유태인은 북한을 대치하고 있는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는 교훈적인 국가모델이었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유태인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은 이스라엘 밖으로 한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사방에서 반유대주의를 접한다.

 

중세에 유태인들은 주변 사회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학살, 추방의 고난을 반복하여 겪곤 했다.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에 유태인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들은 유태인을 괴롭혔다. 유럽에 흑사병이 발생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자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유언비어가 번져 나갔고 이것은 유태인 학살을 부추겼다. 심지어 유태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먹는 누룩 없는 빵 마짜를 만들 때 기독교인 갓난아기의 피를 섞는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대금업자 유태상인은 유태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이다. 유태인들이 대금업에 종사하게 된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중세에 유태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가 없었다. 토지 소유의 금지는 유태인들에게 무역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또 금융업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대금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여 유태인들만이 천한 대금업을 하도록 했다. 중세교회는 유태인들을 사탄과 손을 잡은 사악한 무리라고 낙인찍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제한시켰다. 유태인은 수치와 멸시의 동의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태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 시대마다 나타난 뛰어난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태교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준 덕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육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내가 이스라엘에 가기 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안티세미티즘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사실 그런 것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독립 기념일 전날을 홀로코스트(대학살)의 날로 지킨다. 독립을 자축하기 이전에 유태인들은 안티세미티즘의 희생제물이 된 동포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에서 내가 처음으로 맞은 홀로코스트의 날에 나는 키부츠 강당에서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록영화를 보았다. 육백만 유태인이 나치에 의하여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인 야드 바셈에서는 그때의 생생한 장면을 사진과 기록으로 접할 수 있다.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게토에서 굶주려 죽은 앙상한 시체를 마치 장작을 쌓듯이 쌓아 놓은 사진. 구덩이에 포개어져 있는 시체, 옷을 벗기운 채 구덩이 앞에 서 있는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뒤에서 총을 쏘는 나치 군인들, 죽음의 수용소, 가스실, 생체실험, 불태워지는 시체들, 이런 끔찍한 사진들이 야드 바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임

 

유대인들의 고난과 함께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은 가해자가 교회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중세 교회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개신교 교회도 방관자였으며 나도 간접적으로는 가해자들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예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제국주의 시대가 지난 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일본의 만행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히 젊은 일본인이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본인은 책임이 없지만 조상들의 잘못에 대하여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하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를 뻔뻔한 일본 놈이라고 욕하지만 후자를 양심이 있는 지성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역사에 무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과거의 상처로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데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이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아직도 종군 위안부 할머니며 사할린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떠올릴 때마다 흥분한다. 너무나도 또렷한 증거들을 부정하는 일본인들을 보면 그들이 혹시 집단 정신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한다. 일본의 어떤 언론인이 유대인의 육 백만 학살은 조작된 것이며 그런 사실은 없었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언론은 즉각 제이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한국과 아시아 국가에게 저지른 만행을 샅샅이 들추어내었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만행까지도 부인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텔아비브 대학 내에는 디아스포라 박물관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녀노소의 유대인의 얼굴이 여러 개의 큰 화면에 나타나도록 설치되어 있다. 박물관 한 쪽에는 약간 조명을 어둡게 한 검은 벽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글이 쓰여 있다.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교회는 침묵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온 후에도 이 구절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 . 키부츠 울판에서 공부할 때였다. 나는 기초 반이었는데 옆 반의 중급반 선생님 여호수아는 나이가 꽤 든 분이었다. 나의 여호수아에 대한 첫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팔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문신이라면 깡패나 나쁜 사람들이 새기는 그런 것이었다. 울판이 시작되기 전에 여호수아도 다른 키부츠 멤버처럼 일을 하고 있어서 그가 선생님이라고는 짐작치 못했다. '지금은 비록 교사이지만 아마도 여호수아는 젊었을 적에 한가락하던 사람이었겠군'. 나는 여호수아에게 그런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 때 만해도 유태인들이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사실은 여호수아도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한 사람임을 알았다. 팔에 새겨진 문신은 바로 그의 이름을 대신한 죄수 번호였다. 여호수아 선생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본 자신이 부끄러웠다. 히브리어 울판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복해서 가르쳤다. 원래 언어를 배울 때는 다양한 내용을 접하기는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였다. 이런 내용을 배우는 날이면 괜한 압박감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의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다. 육 백만 학살 추모관인 '야드 바셈'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젊은 세대가 혹시라도 조상들의 고난을 잊어버릴까봐 반복하여 교육을 시킨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데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그네들의 결의를 보면 한편으로는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스라엘밖에는 도처에 안티세미티즘이 널려 있다. 독일에서는 심심지 않게 네오 나치즘이라는 나치의 망령이 살아나 유태인을 두렵게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럽 여행을 할 때 자기 신분 밝히기를 꺼린다. 잘못하다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대학에는 가장 싼값에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는 이스타 여행사가 있다. 방학 때 유럽으로 가는 티켓을 알아보느라고 여행사는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유럽으로 처음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티켓을 주면서 설명을 하는 직원의 말을 듣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함부로 밝히지 말아라. 그리고 되도록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도 히브리어로 하지 말고 영어로 얘기를 하는게 좋을 꺼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늘 가슴 조이며 살아왔던 그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안티세미티즘에 긴장한다.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신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유대민족의 고난을 전세계에 알리면서 명예도 얻고 돈도 버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는데 성공했다.

 

쉰들러리스트 영화 중에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젊은 남녀가 몰래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실제 인물로 아직도 이스라엘에 생존해 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주인공인 노부부가 이스라엘 TV에 소개되었다. 노부부는 자식과 손주를 거느린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평범한 노부부의 모습 어디에서도 죽음의 수용소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면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적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용감했던 이들은 서로 다른 수용소로 헤어져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 연인에게 살아남을 힘을 준 것은 사랑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는 '여명의 눈동자'를 이스라엘에서 보게 된 것은 한국에서 방송된 후 2년이 지나서였다.

 

한 유학생 가족이 받은 이 비디오 테이프를 함께 보게된 것이다. 당시에는 VTR을 가지고 있는 유학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TV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유학생들은 비디오 상영을 하는 그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여명의 눈동자를 보았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것은 어찌 그리 나치와 똑 같은지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야드 바셈이나 다른 자료로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수없이 듣고 배웠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다. 생체실험이나 종군위안부 문제는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는 유태인과 우리는 참으로 대조가 된다.

 

우리는 용서 안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은 다 잊고 있다니 말이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 후 유태인과 조선인에게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대조적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사죄하고 이스라엘에 배상금과 물자를 제공했다. 독일은 전쟁 후 유태인에게 용서를 비는 뜻으로 '참회의 날'을 정했다고 한다.

 

-발췌 이스라엘 문화원 [유대학술 세미나 3.안티세미티즘에서-


목록으로
오늘 0 / 전체 16
no. 제목 조회수 작성일

 

 
                                                                                      키비소개     |    개인정보취급방침     |    찾아오시는 길     |   후원안내   
|   사이트 맵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352 신동아쇼핑 211호   TEL.02-792-7075/6  070-7124-7075  FAX.02-792-7050 
                                                                                                                     Copyright ⓒ 2016 KIBI all right reserved.